내게 집착하는 마왕 고르기

2022. 5. 28. 23:59
300x250

 

wrt. 타인의 상실

Copyright ⓒ 2016 타인의 상실. all rights reserved.

무단복사 및 개인사용, 영리목적으로 이용시 민형사상의 법적 책임을 묻겠습니다.


소문 따위가 아닙니다. 그는 모든 곳에 없으나 모든 곳에 있고, 보지 않고도 볼 수 있으며, 손을 뻗지 않아도 원하는 것을 취하고, 가지려하지 않아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게 마왕이에요.

 

순진한 소문이에요. 마왕같은 게 어디있어요?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누가 복음 24장 37-39절

 

 

내게 집착하는 마왕 고르기


1. 모태구

 

천국에도 기울어진 땅은 있는 법이다. 모두가 공평한 곳에서 오직 여주만이 기울어진 구덩이 속에 서 있었다. '왜'라는 물음은 통하지 않는다. 애초에 모태구가 하는 행동에 '왜'는 없고 방점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태구에게 모든 걸 빼앗긴 여주의 천국은 나락이나 다름없는 지옥이었다.

 

- 날 위해 희생했으니까 회장 자리 정도는 양보하죠.

양보? 하, 뒤늦게 생긴 양심에 눈물이 날 지경이네. 허울 뿐인 회장 자리도 다 내주고.

- 양심이라뇨. 순진한 소문같은 소리네요. 나한테 양심 같은 게 어디있어요?

 

소문을 진실로 받아들였다면 이런 지옥도 없었을까. 회장실 벽면에 걸린 그림을 멀거니 보는 태구가 액자틀에 손을 가져다댔다. 옛날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그곳에 갇힌다고 믿었습니다. 표정없는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는 그림 속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여주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 그럼 그림은 사람을 가둘 수 있는 거 아닐까요?

.........

- 그림같이 아름다운 Y식품 회장 강여주, 성운통운 모태구 사장과 결혼. 마음에 들어요?

누가 당신같은 새끼랑 결혼...!

- 그림같이 아름답고 연약해서 결혼 후에는 명예회장직만 맡고 집에만 있을 겁니다. 그림처럼 조용히. 내 손아귀가 닿는 곳에서.

 

작은 유리 액자가 태구의 어깨 너머로 날아갔다. 액자가 바닥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가 났지만 태구는 눈 하나 깜짝않고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 까불지 말아요, 여주 씨. 그림 하나 찢어버리는 것처럼... 목숨 하나 찢는 거 나한테 일도 아니야. 

- 그러니까 얌전히 모태구 소장품으로 살아.

 

 

 

 

2. 박중길

 

아무 담벼락에 기대 서 있지 말게. 듣기 싫은 게 들려오니까. 담배 끝을 두드리는 중길은 별안간 그 말이 떠올랐다. 누가 한 말인지 기억조차 못 하면서 어떤 말이었는지는 정확하게 떠오른다. 

 

.. 사는 게 형벌 같아요. 그러니까 저 좀 가엾게 여겨 주시고, 그러실 마음이 없으시면 죽여주세요.

 

죽었으면, 하고 바라는 자들 중에 진정 죽음을 바라는 자는 많지 않다. 살려달라는 외침임을 잘 알기에 중길은 기대 서 있던 담벼락에서 몸을 뗐다. 짓무른 담배를 바닥에 버리려던 순간, 담벼락을 왕왕 울리는 목소리가 불쑥 건너왔다.

 

아니면 내가 죽을까요. 

 

죽은 자는 참 편해. 연민은 느껴도 사랑은 모르니. 이 또한 누가 했던 말인가. 기억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죽으려는 자를 막으려 했고, 김여주가 함부로 떠나지 못 하게 명부를 지워 다음 생을 삭제시켜버렸을 뿐. 그 기억이면 충분했다. 

 

저승사자가 보였을 땐 드디어 죽는구나 싶었는데 죽고 싶어도 죽지 못 하게 만들었다는 걸 아니까 더더욱 고통스럽게 당신 앞에서 타 죽고 싶어.

- 소용 없는 짓이다. 육신은 타 들어가도 혼은 멀쩡하거든.

 

여주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고, 언제든 죽을 수 없는 기괴한 불사의 존재가 됐다. 생과 사에 함부로 끼어들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저가 하는 짓이 악귀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중길은 기꺼이 여주를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래도 내가 불에 타 죽는 꼴 보면 당신도 기쁘진 않을 거 아냐. 괴롭겠지. 자살하려는 사람 끔찍히도 싫어하잖아.

- ...끔찍히도 싫어하는 짓을 하겠다면 말리진 않겠다. 나는 네 육신을 연민하지만, 네 영혼은 사랑하니까. 죽겠다면 그렇게 해.

네 혼을 취하고 내게서 벗어나지 못 하게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어줄테니까.

 

 

 

 

3. 최무진

 

나이는 조금 있는데 사람이 번듯하고 괜찮아. 일만 알던 사람이라 결혼을 못 했단다. 사진을 보여주며 조심스레 말문을 연 어머니의 표정을, 여주는 지금도 잊지 못 한다. 나이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알고보니 조폭 집단에서 회계사 일을 하다 감옥에 간 아버지만 구해낼 수 있다면, 그게 마왕이라 불리는 남자라도 여주는 기꺼이 그를 선택할 수 있었다.

 

- 칼 들고 설칠거면 찌르기라도 하지, 애새낀 왜 팼니.

그딴 걸 지금 질문이라고 해요?

 

아버지는 감옥에서 자살했다. <너한테 부끄러워서 나 못 산다. 엄마 잘 챙겨라.> 유서같지도 않은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장례식장에서 밤새 영정 사진만 내다보던 어머니도 그 뒤를 따랐다. 죽는 건 다 불의의 사고야. 그렇게 생각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위로하던 이 남자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태주 죽이려고 했잖아. 죽이려고 칼 들었고 죽일 마음으로 팼어. 

- 그래서. 죽였어?

.........

- 안 죽였어. 여주야, 내가 늘 말하지. 넌 마음이 약해.

 

여주의 팔이 무진의 손에 이끌려 올라온다. 칼을 들고 멋대로 휘두르느라 이곳저곳에 자상이 생겨 울긋불긋한 피딱지가 올라온 팔을 내려다보던 무진이 상처 위에 조심스레 입술을 댔다.

 

- 아가, 네 몸에 생기는 상처들이 나한테는 더 괴로운 일이니까 날 죽이고 싶으면 네 몸에 상처내지 말고 그냥 나를 찔러.

 

그랬지. 최무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여주는 마음이 약하다는 걸.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밟지 못 하는 유약한 사람이라는 걸.

 

- 그때는 그냥 얌전히 네 손에서 죽어줄게. 내가 네 손에 예쁘게 뒤져주는 거 하나 못 하겠니.


갈수록 날이 더워지네요! 더위 조심하세요. 트위터에 중길이 꼭 쓴다고 다짐했는데 어떻든... 뱉은 말은 지켰습니다v^_^v

300x250

'Selec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를 원하는 남자 고르기  (10) 2022.01.01
악당이 된 남자 고르기  (8) 2021.09.17
내게 헌신할 남자 고르기  (5) 2021.06.24
벼랑 끝까지 끌고가는 남자 고르기  (9) 2021.05.20
당신의 왕이 될 남자 고르기  (15) 2021.05.04

      즐겁게 읽으셨다면 상단의 하트 버튼을 눌러주세요. 댓글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BELATED ARTICLES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