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원하는 남자 고르기

2022. 1. 1.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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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원하는 남자 고르기

 


 

1.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을 믿는 사람은 한 번도 도망해 본 적 없는 자다. 낙원을 바라고 도망가는 사람은 없다. 이 지옥에서 탈출하기를 바랄 뿐이다. 리제는 몇 번이고 그 말을 떠올렸다. 이, 지옥에서, 탈출하고 싶다. 파티에 참여하지만 않았어도. 부탁만 받지 않았어도. 피아노 연주를 해서는 안 됐는데. 아니, 애초에 피아노 따위 배우는 게 아니었는데. 빌 에반스를, 에디 히긴스를 사랑해선 안 됐는데. 후회는 일이 벌어진 이후에 드는 감정이다. 

 

 

- 지겨워해선 안 되는데, 요즘 부쩍 잊네요.

 

피아노 뚜껑을 매만지는 태구의 시선이 리제의 눈으로 향했다. 

 

-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거예요, 아니면 내 인내심 테스트를 하는 거예요.

날 좀 놔줘요. 

- 틀렸어요. 내가 원하는 답은 그게 아니야.

 

그가 원하는 답은 잘 알고 있다. 사랑해요. 거짓이라도 기꺼이 속아주겠다는 그 말을 리제는 끝까지 꺼내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기민하고 똑똑하다. 기꺼이 속아주겠다는 말이 되레 거짓일 것이다. 말을 해서 달라지는 게 있다면 모험해볼 수도 있다. 고민 끝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피아노 계속 칠게요. 태구 씨가 원하니까. 사랑하는 사람 부탁 하나 쯤은 들어줄 수 있어요.

- 봐.

 

옅게 웃는 태구가 리제의 손가락을 들어올려 짧고 깊게 입을 맞췄다.

 

 

- 속아준다니까, 기꺼이.

 

 

 

 

 

2. 

 

거긴 짐승이 산다오. 나무를 내려놓는 나무꾼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수를 놓는 척하며 슬쩍 방문을 연 여주는 귀를 세웠다. 어마! 그 소문이 사실인가봐요. 귀목골에 사람 짐승이 산단 소문말예요. 박에 물을 떠온 행랑어멈이 나무꾼의 말을 거들었다. 귀목골 짐승. 여주도 익히 들어온 소문이다. 벌건 눈에 흰 비단처럼 고운, 사내의 모습을 한 짐승이 산다는 소문. 창귀처럼 밤이면 찾아오는 짐승인데, 그에게 물리면 해를 보자마자 온 몸이 타올라 죽는 병에 걸린다고 했다.

 

걱정이여요. 귀목골 짐승이 여간 위험한 게 아니람서요?

어휴, 사내나 물고 말어요. 아씨 걱정은 마시라니까.

 

껄껄 웃는 나무꾼이 행랑어멈에게 박을 건넸다. 눈치채지 않게 문을 닫은 여주는 조용히 은장도를 챙겨 품에 숨겼다. 귀목골 짐승 소문을 들었을 때 부터 그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낮에는 도통 그 모습을 볼 수 없고 밤에만 볼 수 있는 짐승. 벌건 눈에 고운 피부를 가진 남자. 그 소문에 마음이 동하지 않은 처녀는 없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녘, 여주는 집을 빠져나와 귀목골로 향했다. 제법 길이 잘 닦여있어 오르는 데는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그 짐승이 정확히 어디에서 나타나는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씨. 귀목골 짐승이 어디서 나타나는지도 들었어야 했는데.

 

 

- 짐승이면, 날 찾는겐가?

 

인기척은 없었다.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짐승은 분명히 여주 앞에 서 있었다. 비단 같이 고운 피부에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면서. 놀란 여주가 주춤하다 뒤로 물러섰다. 

 

귀, 귀목... 귀목골 짐승.

- 그리 부르는 자들도 있지만, 내게는 귀鬼라는 이름이 있소.

 

손등으로 대강 피를 닦은 귀가 여주를 내려다봤다. 고개를 꺾어야 얼굴이 보일만큼 그는 키가 컸다. 마을 아녀자가 떠도는 소문에 어둡지는 않을테고. 하얀 얼굴 위로 어렴풋 미소가 번졌다.

 

- 이것도 연이라면 연일테지. 

무, 무슨 연 말예요?

- 달이 기울 때 찾아오는 여인이 이루지 못 할 평생의 연정이 될 거라는 지긋지긋한 예언. 기 백년을 그 예언에 시달리며 살았어. 실망하고, 실망하고, 또 실망했지.

 

귀가 가까이 다가왔다. 주춤대던 여주가 다시 뒤로 물러났다. 허나 더 이상 갈 길은 없었다. 딱딱한 나무가 등에 닿았다. 귀의 얼굴이 지근거리로 다가온다. 

 

- 나는 예언 따윈 믿지 않소. 하지만 그게 이뤄진 이상, 그대로 따르지는 않겠소.

 

귀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

 

 

- 이루지 못 한다면 꺾어서라도 곁에 둘테니까.

 

 

 

 

 

3.

 

최무진이다. 처음 만난 날, 남자는 그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제 아버지처럼 깡패일테니 직업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았지만 나이는 모른다. 무진은 아버지가 죽은 다음 날 찾아왔다. 장례는 신경쓰지 마. 알아서 모셔줄테니까.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에 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아빠랑 친했어요, 아저씨가? 그래서 이렇게 친절한 척 하는 거예요? 깡패새끼 주제에?

 

진의 아버지가 조직에서 나온 건 십 년도 더 지난 일이다. 조폭이었다는 것도 우연히 알게 된 것이었다. 그때부터 진에게 아버지는 창피한 존재가 됐다. 죽은 그 날도 어김없이 증오하고 있었기에 아버지의 죽음이 더 증오스러웠다. 그까짓게 뭐라고. 

 

 

- 깡패 새낀 친절하면 안 돼?

네. 안 돼요. 역겹거든요.

 

무진은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그리고, 역겨워하는 누군가를 위해 친절해보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진이 취하고 원한 모든 것은 무진이 내어줬으나 그녀는 감사할 생각도,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약자를 괴롭혀 빼앗은 것을 약자인 저가 갖는 거라는 생각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하든 무진은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가 감정을 드러낸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 뺨, 왜 그래. 어디서 그랬어.

..깡패 아니랄까봐 어디서 맞고 온 건 귀신같이 아네. 별 거 아니에요. 나더러 아저씨 정부라길래 좀 싸웠어요.

 

무진의 손이 진의 볼 위에 내려앉았다. 감정에 이어 처음 하는 행동이었다. 진이 눈을 치떠올리자, 무진이 볼을 감싸 쥐었다.

 

- 정정해줬어야지. 너는 내 정부가 아니라, 내가 네 개새끼라고.

 

 

-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해달라는 건 다 해주는 충직한 개새끼가 있으니까 한 번만 더 손 올리면 죽여버리겠다고 말해.

 

 

 

 

 

4.

 

그만두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여러가지 반응을 보인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 그만두라는 말을 들으면 대개 동요하거나 화를 낸다. 지은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단호하게 그 말을 할 수 있었다. 윤기야, 이제 그만 해. 네 감정 나한텐 폭력이야. 단호해서 더 날카로웠고 매서웠다.

 

 

- 좋아해달라고 말한 적 없어요.

좋아한다는 말은 좋아해달라는 말과 같아. 그러니까 그만 해. 너는 학생이고, 나는 선생이야.

 

오래 전 드라마의 명대사를 읊게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대학생과 강사 사이이긴 해도 사제지간이었다. 캔버스 위에는 그리다 만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이 다 그려지면 지은은 대학을 떠날 생각이었다.

 

- 그림 그만둘게요.

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 선생님이니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윤기에게 걸린 기대는 지은이 처음 주목을 받기 시작한 때 보다 컸다. 잘 닦인다면 한국을 대표할 작가가 될지 모르겠다는 말이 벌써부터 돌 만큼. 별 거 아니잖아. 시간 지나면 다 잊혀질 감정이고. 가까스로 꺼낸 지은의 말에 윤기의 표정이 차게 변했다.

 

- 비행 중인 비행기에서 갑자기 내리라는 말을 들은 기분이에요. 여기서 그만두면, 나는 죽잖아요?

- 그림 같은 건 관둬도 상관 없어요, 근데.

 

 

- 선생님 좋아하는 걸 관두면 죽어요, 나는.


연말에 올리려고 했는데 좀 늦어졌네요. '비행기에서 내리라는~'은 김사과 작가의 소설 문장을 일부 인용했습니다. 이벤트 신청해주신 분들 중 먼저 처리할 수 있는 순 (웬만해서는 먼저 써주신 분) 위주로 써드리려고 합니다. 기한은 달리 없으니 늦게 참여하셔도 상관 없습니다. 신청해주신 인물들도 우선 스토리가 떠오르는 인물들 위주로 쓰고 있으니 신청 인물이 아직 안 나왔더라도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늘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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