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끝에서 만난 욕망과 탐욕, 퇴폐의 이름을 가진 남자 고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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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해빠진 내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욕망' 이라는 이름의 전차.
3개의 역을 지나, 마지막 행선지인 '묘지' 에 다다르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가진 돈을 모두 전차티켓을 사는 데에 소비했다.
아무런 소리 없이 조용히 들어오는 전차에 몸을 싣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오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죽음을 향해 기꺼이 걸어간다.
01 욕망 :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함.
차창 밖으로 넘어가는 풍경이 퍽 아름답다. 전차 안의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분위기를 가지고 일절 대화없이 서로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 어느 역에서 내리나?
불쑥 나타나 앞좌석에 앉은 남자는 입에 담배를 문 채 내게 물었다. 틱, 틱 부싯돌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이 일며 남자의 담배에 그을리듯 달라붙는다.
묘지역으로 가요.
- 내기할래?
안해요. 돈이라면 전차티켓을 사는 데 다 썼어요.
- 가진 거 또 있잖아.
없어요.
- 너를 걸자.
말씀 드렸다시피 저는 묘지역으로 갑니다.
- 네가 욕망에서 내릴 수 있는지 없는지, 너를 걸고 내기해.
할래? 혹은 하고 싶지 않아? 같은 질문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였다. 남자가 태우고 있는 담배의 희뿌연 연기가 콧잔등을 넘어 눈 위로 올라가다 홀연히 사라졌다.
좋아요. 당신을 따라서 내리면 내가 진 걸로 해요.
- 나는 가끔 이 전차에 타. 그리고 항상 욕망에서 내리거든. 근데 한번도 전차에서 뭘 가지고 내린 적이 없어. 무언가 갖기 위해서 이 전차를 계속 타는거지.
몇번 타오르지도 못한 담배가 남자의 손에서 강제로 불빛을 삼켜가며 으스러진다. 바닥에 떨어진 담뱃재에 시선을 옴기자, 퀴퀴한 연기가 묻은 묵직한 손이 내 턱을 움켜 쥔다.
- 오늘은 널 갖고 내릴거야.
남자의 입술이 내 윗입술에 닿았고 아릿한 통증과 함께 날카로운 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턱을 쥐고 있던 손은 열이 오른 귓불을 쓰다듬었다가, 이내 아플정도로 내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며 얼굴을 떼냈다.
흔하고 유치한 방법이네요.
- 흔하고 유치하다니. 흥분하라고 하는거야.
머리칼을 쥐고있던 손이 스르르 풀리며 자연스럽게 목덜미에 멈추어섰다. 그리고는 곧장 제 쪽으로 내 몸을 끌어당기고 자신의 옆자리에 앉힌다. 남자의 혀가 입술을 훑고 지나가자 축축하게 남은 자국이 튀어오를 것처럼 두근거렸다.
- 이런게 재미야.
순식간에 달아오른 안압에, 목구멍을 빠져나가려는 날숨들은 호흡을 방해했다. 어지러운 시야를 바로잡으려 차창에 기대려는 순간 남자의 손이 내 머리를 받쳤다. 별안간 고개를 들어올린 남자가 입꼬리를 들썩이며 검지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쿡쿡 눌렀다.
- 이거 타고 죽으러 갈래,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오늘 죽어볼까.
02 탐욕 : 지나치게 탐하는 욕심.
잠깐 전차를 둘러보고 자리로 돌아와 눈이라도 붙일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저리 칸을 옴겨다니며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은 조종실을 앞둔 직원용 칸. 오로지 레일 위를 달리는 소리만이 가득한 이 곳은 바깥 풍경보다 더욱 더 지루하다.
- 사막 속에 오아시스라.
문칸에 기대어 서있던 남자가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니면 장미던가. 남자의 애매모호한 말에 고개를 치켜 올렸다.
장미가 어디있어요?
- 말하고 있잖아요.
누가요.
- 당신.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남자가 다가와 나를 벽에 밀쳤고, 입술을 부딪혔다. 뒷통수에 느껴지는 통증보다 남자의 행동이 나를 더 두렵게 만들었다.
뭐하는 짓이에요?
- 꽃은 꺾이기 위해 태어나는 거니까.
처음과는 달리 배려없는 거친 키스는 도무지 제 정신으로 서 있지 못할 정도로 강렬했다. 이런 식으로 있다가는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있는 힘껏 그를 밀치고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남자는 재밌다는 듯 픽 웃으며 내 눈가를 어루만진다.
- 죽으러 가는 길인가봐요?
그러면 그쪽이 뭐 어쩌게요.
- 여행은 끝났어요. 끝난 여행, 꿈으로 채워줄까요?
은근히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 그 쪽 아닌데.
손을 끌어당긴 내 손을 제 입술 위에 얹고 슬쩍 입을 벌렸다. 새카만 암흑 같은 동굴 사이로 손가락이 말려 들어간다. 처음 느껴보는 농밀한 스킨십에 아무런 반항도 못한 채 남자의 새까만 머리카락만 쳐다보고 있었다.
- 내려. 꺾어줄테니까.
03 퇴폐 : 풍속이나 도덕 따위가 건전하지 못하고 문란한 상태.
마지막 역을 앞두고 마음이 착잡해졌다. 원한다면 묘지역에 닿기 전에 퇴폐에서 내릴 수도 있지만 좀처럼 쉬운 결정은 아니다.
- 어쩐지 전차가 타고 싶더라.
셔츠 넥타이를 푸르던 남자가 몸을 틀어 나를 보고 웃는다.
- 묶이는 거랑 묶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당신 취향이지?
무슨 소리에요?
- 아, 그쪽 취향. 그래도 처음 보는 여자인데 맞춰주려고.
불쾌한 언행에 자리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남자가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벗겨진 하이힐이 바닥을 뒹굴고, 남자의 차가운 손은 내 발을 감싸쥐었다. 당혹감에 볼 우물이 잔잔하게 진동을 띄워보내자, 남자가 웃는다.
- 나 그런 표정 좋아해.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날 보던 남자가 내 귀를 쥐고 제 얼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귓불을 간지럽히는 숨결과 남자의 치아가 생경한 황홀경을 펼쳐냈다. 귀에 닿아있는 입술이 눈 위로 올라가다 천천히 입꼬리로 내려온다. 입꼬리를 농락하는 입술이 툭 떨어지고 남자가 내 머리를 감싸 안았다.
- 넌 이제 네가 어디서 내려야 할 지 알거야.
가까스로 고개를 내저으며 남자에게서 떨어져 나와 등을 돌려 앉았다. 남자는 바로 내 허리를 쥐고 뒷목 위에 입술을 꾹 내려 찍었다.
안…내려요.
- 아직 못 들었어. 당신이 환희에 차서 지르는 비명.
섹시한 페퍼향이 콧등을 간지럽혔다.
- 죽기엔 아까워. 오늘 네가 전차를 탄 건 잭이 타이타닉호의 티켓을 딴 것과 같은 수준의 행운이지.
……….
- 네 모든 걸 채워줄 남자를 만났잖아, 여기서.
전차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진다. 기장의 안내멘트가 나오면, 남아있는 사람들은 나갈 채비를 할테고 남자는 퇴폐에서 내릴 것이다. 나는… 내릴까, 죽으러 갈까.
- 죽음에 다다르기 전에 만난 남자는 지옥보다 더 뜨겁고….
……….
- 천국보다 아름답고 황홀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지.
- 지옥의 끝에서 만난 천국의 피폐함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지 알고 싶다면 나를 따라 내려.
…
…
…
내리셨습니까?
아직 전차에 타고 계신 승객분들이 있는 관계로 출발합니다.
초창기 때니까 거의 2년 전에 쓴 글이다.
빻음 파티가 따로 없네^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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