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 팀장님

2017. 1. 1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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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님








1.




 차였다. 그것도 보기좋게. 아니, 어쩌면 가장 불쌍하고 추접한 모양새로. 카톡으로 날아온 두개의 메시지는 내 눈물샘을 자극하고 눈물을 터뜨리는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나 여자 생겼어. 그만 헤어지자. 꽤 오래 전부터 바람이 났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곧 돌아오리라는 헛된믿음은 배신이 되어 칼날같이 날아들었다.



 "나쁜놈. 나 버리고 얼마나 잘 사는지 보자."



 당장 눈물 한 방울이 아까운 놈한테 흘려보내는 것이 아까우면서도 눈물이 난다.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연신 눈물방울을 닦아내고 있는데, 내 머리 위로 대뜸 그림자가 올라섰다.





 "김여주씨."

 "팀, 팀장님!"

 "지금 업무시간에 여기서 뭐하…."

 "죄송합니다."



 살짝 그늘진 미간이 금세 이마께로 추켜 올라갔다. 필경 화장으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보고 놀란게 분명하다.



 "웁니까?"

 "아뇨. 아, 안 울어요…."

 "왜 웁니까? 내가 오전에 미팅 늦었다고 혼내켜서 웁니까?"



 재빨리 도리질을 치는 내 머리를 의뭉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팀장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눈밑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아 제딴엔 혼나서 우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하는 모양이다. 아니에요, 팀장님이 혼내키셔서 그런 거 아니에요. 슥슥, 다시 눈물을 닦아내고 부정의 뜻을 전하자 팀장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천천히 들어오세요."

 "………."

 "이번엔 늦는다고 안 혼내요."



 뚜벅뚜벅, 짙은 구두굽 소리만 남긴 팀장이 문을 열고 나갔다. 하필이면 팀장한테 이런 모습을 들키다니. 창가로 들어오는 햇빛이 유난히 밝게 느껴진다.


 정말 개같은 날이다.




 2.




 책상 위에 올려진 상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앙증맞다. 꼭 수건이 들어가있을 듯한 사이즈에 누군가 낑낑대며 포장한 듯 끄트머리에 어색하게 붙은 테이프는 이해하기에 너무 이상했다. 



 "정대리님, 저 나간동안 누가 이거 여기 올려놨는지 아세요?"

 "아, 그거? 팀장님이 놓고 가시던데."

 "…팀장님이요?"

 "별 말씀 안 하셨어."



 나도 궁금해 죽겠네. 그거 뭐야? 어딜 급하게 갔다 오셨는지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서 여주씨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가시던데. 힐끔, 상자를 올려다보는 정대리가 호기심에 가득찬 목소리로 말했다. 팀장님이 두고간거라고? 슬쩍 올려본 상자는 생각 외로 꽤 무게감이 있었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포장지를 벗겨내자 쌩뚱맞은 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주 곶감.」


 10개들이 상주 곶감이 양쪽에 5개씩 모여 드러누운 채로 수줍은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게 뭐야? 당황스러운 마음에 상자를 이리저리 만져대는데, 상자의 밑바닥에 무언가 톡 걸렸다. 상자의 머리를 들어 확인해보니 작은 포스트잇이 정중앙에 달라붙어 있었다.


 




 "…무슨 선물로 곶감을 줘. 추석이야 뭐야?"



 부스럭 소리에 혼잣말까지 더해지자 호기심에 견디다 못한 정대리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왜, 왜? 뭔데? 어쩐지 민망한 마음에 상자를 무릎 위에 올리고 어색하게 베시시 웃자 정대리가 삐친 듯 자리에 앉는다. 



 "뭐야 이게…."



 잔소리에 잔소리를 하면서도 미안한 기색 하나 없더니 우니까 좀 미안해졌나보지? 팀장때문에 운건 아니지만. 이걸 어떻게 할까, 하얀 설탕가루를 한참이나 노려보다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나 결재를 핑계로 팀장실에 들어섰다.





 "결재서류면 내려놓고 가세요."

 "그게 아니고요."

 "회의록이면 오늘 안 올려도 괜찮…."

 "팀장님!"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팀장이 높아진 목소리에 빼꼼히 머리를 빼냈다. 네, 말씀하세요. 무뚝뚝한 눈이 내 얼굴 위로 향했다.



 "그, …감이요…."

 "크게 말해요. 안 들립니다."

 "곶…! 감…. 팀장님이 주신 곶감, 뭐에요?"

 "곶감입니다."



 야. 내가 그걸 몰라서 물어봤겠니? 삐쭉 올라간 입술을 겨우 끌어 내리고 다시 묻자 별안간 팀장이 피식 웃었다.



 "곶감 주면 안 우니까."

 "네?"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 모르나? 아이가 곶감 소리에 울음 뚝 그친 이야기?"

 "………."

 "울지말라고."



 팀장이 말한 전래동화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게 지금 내가 통곡을 한 것과 무슨 연관관계가 있는 것인가. 심지어 대상은 아이인데. 대꾸없이 가만히 있는 나를 보던 팀장이 말을 덧붙혔다. 선물. 팀장과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에 소름이 오소소 올라온다.



 "안 주셔도 되는데요. 팀장님 때문에 운 거 아니에요."

 "그럼 준 거 뺏습니까?"

 "………."



 "그냥 드세요. 여주씨 예쁘다고 주는 거 아니니까."



 할 말 끝났으면 나가봐요. 슥, 모니터 뒤로 숨는 얼굴이 목소리만 드러냈다. 하여간 말하는거 보면 마음에 안 든다니까. 하고많은 것 중에 곶감이 뭐야 곶감이? 저 혼자 메리추석하시고 난리났네. 꾸벅, 감사 인사와 함께 나오자마자 곶감상자를 집어들었다. 까짓거 안 예쁘단 말 들을 바에 다같이 안 예쁘고말지.




 3.



 "근데, 웬 곶감이에요?"

 "팀장님이 주셨어요."



 잠깐 점심시간을 틈 타 동료 사원들 손에 곶감 하나씩 들려주자 의아한 눈으로 묻는다. 팀장님이? 뭐야, 여주씨만 편애하시는거야? 저마다 한 마디씩 늘어놓는 사원들의 말에 헛웃음이 났다. 허구헌 날 잔소리하는게 무슨 편애에요. 생략된 말 대신에 어색한 웃음을 보이자 말없이 곶감만 쥐어물고 있던 박주임이 대뜸 입을 열었다.



 "팀장님이 여주씨 좋아하시나보네요."

 "푸훗, 뭐라고요?!"

 "왜, 몇년 전에 그거 있었잖아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곶감 좋아하냐고 물어보는 거."



 어머 여주씨 남자친구랑 헤어졌다며? 이참에 팀장님이랑 새출발해. 팔을 툭 치며 얄궂게 말하는 강대리가 음흉하게 웃었다. 쿨럭, 헛기침을 하는 정대리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저 인간한테 말한 내가 바보지. 곧 있으면 새도 듣겠다 새도. 가늘게 늘어진 시선의 끝, 익숙한 인영이 사로잡힌다.





 "맛있어요?"

 "켁, 켁!"

 "여주씨."



 화난 듯 어두워진 낯빛과 말투. 팀장이었다.




 4.



 팀장은 생각보다 속이 좁은 인간이었다. 까짓 곶감 좀 나눠먹었다고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기 시작하더니 이젠 아예 투명인간 취급을 해대고 있다. 그덕에 금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야근하는 팀장 옆에 달라붙어 있는 아양, 없는 아양을 다 떨어가며 기분을 풀어주는 수 밖에 없었다.



 "퇴근하라니까 왜 퇴근 안하고 있습니까?"

 "팀장님이 화나셨는데 어떻게 퇴근을 해요."

 "왜. 금요일만 되면 남자친구 만난다고 신나서 나한테 인사도 안하고 갔잖아."

 "……오늘부터 안 그래요."

 "왜요."



 궁금한 듯 묻는 팀장의 말에 잠깐 의심이 들었다. 정대리 입을 거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팀장이 몰랐단 말이야? 머뭇거리다 남자친구랑 헤어졌거든요, 하고 나즈막히 대꾸했다.





 "알아요."

 "네? 아는데 왜 물어보세요?"

 "여주씨 입으로 듣고 싶어서요."

 "하, 제가 차였다는 말 듣고 놀려주시게요?"



 속좁은 좀팽이가 아니라 졸렬한 놈팡이잖아! 팀장님, 너무 하시네요. 저 퇴근하겠습니다. 제가 차여서 그런지 오늘 술 생각이 간절하거든요. 벌떡 자리를 벅차고 일어나자 팀장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거 아닙니다. 단호한 말투에 반박할 새도 없이 팀장이 말을 이었다.



 "그럼 왜 물으신건데요?"

 "나한테도 말할 기회가 있는지 없는지 확신이 필요했으니까."

 "무슨 소리에요!"



 시선을 내리 깔은 팀장이 살짝 입술을 떤다.





 "17기 입사 환영식에서 처음 봤을 때, 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수백명이 모여있는데 그중 여주씨가 가장 눈부시게 예뻤어."

 "………."

 "그래서 여주씨만 보였어요."



 어렵게 말을 꺼낸 팀장이 살짝 고개를 추켜올렸다.



 "그리고 여전히 여주씨만 보여요."



 온통 쏟아지는 시선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두근거렸다. 오늘 차인 주제에 다른 남자한테 설레는 꼴이라니, 막말로 바람난 놈한테 차였으니 그러고도 남는다지만 팀장한테 너무 미안하지 않은가. 저기, 팀장님. 조심히 팀장의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팀장이 뜬금없는 말을 한다.



 "전 남자친구가 여주씨 좋아하는 배우 닮았다고 좋아하던게 생각납니다."

 "…그게 갑자기 왜…."

 "난 누구 닮았다는 말, 들어본 적은 없지만."



 살짝 비스듬히 뉘인 팀장의 얼굴 위로 꽃물같은 미소가 번져 올랐다.





 "여주씨 새 남자친구로 닮지 않았어요?"



 미소가 만개한 얼굴의 끝에 달린 귀까지 꽃잎처럼 새빨갛다. 사춘기소년처럼 수줍은 마음, 팀장은 생각 외로 순수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슬며시 붙잡은 손을 조심히 감싸쥐는 팀장의 손은 온 마음이 녹아내릴 정도로 따뜻했다.







 개취로 좋아하는 단편.

제훈팀장 언제나 옳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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